TV를 꺼도 화면은 여전히 눈앞에 남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색이 변하고 형태가 움직이는 이 세계는, 기술이 만들어낸 시각의 환영입니다.
그런데 만약 섬유도 TV처럼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요? 전기를 흘리면 컬러가 변하고, 햇빛에 따라 패턴이 달라진다면? 그 상상이 이미 자연 속에 실현된 생물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다의 외계 생명체처럼 생긴 문어입니다.
동물의 색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다양한 색을 띱니다. 이들의 색은 대부분 안료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의 피부색도 마찬가지입니다. 멜라닌이라는 단백질 색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에 따라 피부와 머리카락, 눈동자의 색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피부색도 마찬가지입니다. 멜라닌이라는 단백질 색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에 따라 피부와 머리카락, 눈동자의 색이 달라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푸른 눈 역시 멜라닌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푸른색 자체의 안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산란에 의해 그렇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플라밍고의 주황빛은 먹이 속 카로티노이드 성분이 몸에 축적되면서 나타납니다. 즉, 동물의 색은 색소 자체이거나, 구조에 의한 반사로 결정됩니다.
하지만 섬유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단에 색을 입힐 때는 단 한 번의 염색으로 오랜 시간 색이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햇빛, 세탁, 마찰 같은 외부 요인에 색이 쉽게 바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화학 염료와 복잡한 공정이 사용됩니다.
이 과정에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여러 화학물질이 발생하며, 이 때문에 최근 지속가능한 염색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문어의 피부는 컬러 TV처럼 작동한다
지구 생명체 중 가장 외계 생명체에 가까운 존재를 꼽자면 아마 문어와 오징어일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유연하게 변형되며, 눈은 카메라 렌즈 같고, 무엇보다 피부는 마치 컬러 디스플레이처럼 색이 변합니다.
그들의 몸은 유연하게 변형되며, 눈은 카메라 렌즈 같고, 무엇보다 피부는 마치 컬러 디스플레이처럼 색이 변합니다.
문어의 피부에는 **색소포(Chromatophore)**라 불리는 세포들이 존재합니다. 이 세포는 갈색, 붉은색, 노란색 계열로 구분되며, 각각이 수축하거나 팽창하며 색을 만들어냅니다. 이 작동 원리는 컬러 TV와 유사합니다.
TV는 빨강(R), 초록(G), 파랑(B)의 세 가지 빛을 조합하여 수많은 색을 만들어냅니다. 마찬가지로, 문어의 피부도 삼원색 구조처럼 조합을 통해 다양한 컬러를 표현합니다.
TV에서는 전기 신호가 픽셀을 조절한다면, 문어는 신경 자극을 통해 색소포를 조절합니다. 색소포가 팽창하면 색이 나타나고, 수축하면 사라지는 방식입니다. 이로써 단 몇 초 만에 배경과 똑같은 위장 색을 띠거나, 적을 놀라게 하는 색채 변화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점으로 색을 만드는 기술
문어의 색 표현 방식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프린터의 원리와도 닮았습니다. 컬러 프린터는 보통 청록(C), 자홍(M), 노랑(Y), 검정(K)이라는 4가지 토너만으로 수십만 가지 색을 찍어냅니다.
섬유 인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스크린에 잉크를 얹는 전사 프린팅 방식이 주를 이뤘지만, 지금은 디지털 텍스타일 프린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프린터는 극도로 작은 잉크 점들을 섬유 표면에 찍어 색을 구현합니다. 이 기술을 ‘점묘(Stipples)’ 기법이라 부르며, 색의 그라데이션이나 인물 사진처럼 섬세한 패턴을 표현할 때 필수적입니다.
특히, 옴브레나 수채화 같은 서서히 색이 번지는 스타일은 이런 점 단위 프린팅이 아니면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섬유 디자이너들은 이 기법을 통해 회화적인 표현을 옷감 위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색소 없이 색을 만드는 방법
지속가능한 패션이 요구되는 시대에, 더는 섬유를 염색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색소를 사용하지 않고도 색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없을까요?
자연은 이미 해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조색(structural color)은 안료 없이 색을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빛이 특정한 미세 구조에 부딪혀 간섭과 회절을 일으키면서 색을 만들어냅니다.
공작새 깃털, 나비 날개, 비단벌레의 등에서 볼 수 있는 무지갯빛은 모두 구조색의 예입니다. 물리적인 표면 구조만으로 색이 표현되기 때문에, 빛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메탈릭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기술은 광결정 섬유나 포토닉 소재로 발전하고 있으며, 아직 상업적 적용은 초기 단계지만 앞으로는 색소를 사용하지 않고도 섬유에 다양한 색을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짜 살아 움직이는 섬유는 가능할까?
문어의 피부처럼 즉각적으로 색이 바뀌는 섬유, 과연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최근 연구는 전기나 열, 빛에 반응하는 스마트 텍스타일 개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수 염료를 이용해 빛의 파장에 따라 색이 바뀌는 소재,전류에 반응해 색소 입자가 이동하면서 색이 변하는 섬유 등 미래형 기능성 의류가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컬러 TV처럼 조정 가능한 섬유, 프린터처럼 표현 가능한 텍스타일, 그리고 문어처럼 살아 있는 듯한 표면 반응. 이 모든 것은 단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섬유산업의 다음 단계일지도 모릅니다.
염료를 버리고 구조로 색을 만들고, 인쇄로 감정을 표현하는 섬유. 그 끝에는 자연을 닮은 기술, 그리고 기술을 닮은 자연이 만나는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