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폐기물이라 부르는 플라스틱. 하지만 이와 비슷한 소재가 이미 수억 년 전부터 지구에 쌓여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연이 만든 것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문제와도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그 물질은 바로 ‘리그닌’이라는 식물의 뼈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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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어떻게 하늘을 향해 자랐을까
약 4억 년 전, 지구에는 최초의 육상식물이 등장합니다. 초기 식물들은 부드러운 세포벽을 가진 셀룰로오스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키가 작고, 땅 위에 바짝 붙어 살아야 했습니다. 바람을 막을 힘도, 중력을 이겨낼 구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경쟁은 진화를 부릅니다. 햇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식물은 점차 키를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것이 리그닌이라는 고분자였습니다. 리그닌은 셀룰로오스 사이에 스며들어 식물의 세포벽을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이 구조 덕분에 식물은 수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줄기는 강해지고, 물과 영양분을 끌어올리는 관다발 구조도 발달합니다. 그렇게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식물이 등장하면서, 나무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후 약 5천만 년 동안 지구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입니다. 식물이 단지 햇빛만 흡수하던 존재에서, 지구 생태계의 중심축으로 바뀌는 전환점이었습니다. 리그닌은 그 변화의 핵심 역할을 한 셈입니다.
썩지 않는 식물, 석탄이 되다
당시의 나무는 오늘날과 달리 쉽게 썩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미생물에게는 리그닌을 분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세균도 곰팡이도 이 강력한 고분자 구조를 분해하지 못한 채, 나무는 죽어서도 오랜 시간 쌓이기만 했습니다.
이 죽은 나무들이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겹겹이 눌리며 탄화된 결과가 바로 석탄입니다. 약 3억 년 전 고생대 석탄기에 대규모 석탄층이 형성됩니다. 습지에 묻힌 식물 잔해는 열과 압력을 받으며 점차 검은 에너지 덩어리로 바뀝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리그닌이 너무 튼튼한 탓에 이러한 석탄 형성 과정이 수천만 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점입니다. 페름기에 이르러서야 리그닌을 분해하는 특정 균류가 출현하고, 이로 인해 석탄 생성은 점차 멈추게 됩니다.
즉, 석탄은 ‘분해되지 않은 식물 쓰레기’가 압축되어 만들어진 화석 연료입니다. 인류는 이 축적된 유기물 에너지를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리그닌은 문명의 동력원이 되었던 셈입니다.
현대의 플라스틱, 리그닌과 닮았다
오늘날 환경문제의 주범 중 하나는 플라스틱입니다. 썩지 않고, 잘 분해되지 않는 인공 고분자. 그런데 이 특성은 리그닌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리그닌은 자연이 만든 ‘생체 고분자’지만, 그 구조는 현대 플라스틱 못지않게 안정적이고 강합니다.
리그닌은 열경화성 고분자입니다. 이는 한 번 굳어지면 다시 녹지 않으며, 자연 분해도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일부 미생물은 리그닌을 분해할 수 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립니다. 자연 환경에서는 사실상 분해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지금의 플라스틱 대부분은 석유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식물 유래 물질 중에서도 리그닌처럼 내열성, 내화학성이 강한 구조는 드뭅니다. 이런 이유로 리그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잘 사라지지 않는 물질’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리그닌은 때로는 자연의 실패작처럼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분해되지 않음’이야말로 생태계에 따라서는 저장소의 역할을 했고, 인류에게는 연료와 소재의 원천이 되기도 했습니다.
리그닌, 오늘날의 산업 쓰레기
현대 산업에서 리그닌은 주로 제지 공정이나 레이온 생산 중 부산물로 생성됩니다. 이때 나오는 것이 ‘흑액(Black Liquor)’입니다. 이는 알칼리성 화학 처리 과정에서 생기는 검은 액체로, 리그닌이 고농도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 공장에서는 이를 소각해 에너지로 재활용하지만, 그 처리 과정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때문에 대부분은 산업 폐기물로 분류됩니다. 재활용되지 못한 채 대량으로 버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매년 약 1억 톤 이상의 리그닌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막대한 양의 목재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목재의 20~30%를 차지하는 리그닌이 이처럼 무가치하게 버려진다는 점은 산업계에서도 고민거리입니다.
한편, 이 물질이 갖고 있는 안정성과 내구성은 산업 쓰레기라는 단어로만 설명되기에는 아까운 특성입니다. 문제는 리그닌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아직 완전히 찾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다시 주목받는 리그닌의 가능성
최근에는 리그닌의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생분해성 플라스틱, 바이오 접착제, 탄소섬유의 원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리그닌은 미래의 소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바이오기업은 리그닌에서 방향족 유기 화합물을 추출해, 친환경 플라스틱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석유 기반 플라스틱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아일랜드 리머릭 대학이 주도하는 ‘Libre 프로젝트’는 유럽 여러 기관이 협업하는 대형 연구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리그닌을 저비용 고강도 탄소섬유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항공, 자동차, 건축 산업에서 활용될 수 있는 경량 소재로의 응용 가능성을 열고 있습니다.
리그닌은 과거에는 석탄의 전신으로, 현재는 산업 폐기물로, 미래에는 고기능성 소재로. 시대에 따라 그 쓰임새를 바꿔가며 인류에게 자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버려지지만, 언젠가는 가장 주목받는 소재로 자리 잡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리그닌은 단지 썩지 않는 폐기물이 아니라, 자연이 수억 년 전부터 우리에게 남긴 ‘에너지와 소재의 보물창고’일지도 모릅니다.